ad 1세기경에 이스라엘 땅에 불교가 많이 들어왔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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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ad 1세기경에 이스라엘 땅에 불교가 많이 들어왔는지요?
==> 몇가지 역사를 함께 생각해 봐야 합니다. [1] 우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이 서북인도에서 종료된 후, 현재 서북인도 (파키스탄 일부)-아프가니스탄-이란 지역에는 알렉산드로스가 함께 원정에 참가했던 그리스인들이 잔류해 그곳에 그리스계 국가(들)을 세웠습니다. 이 그리스계 국가를 박트리아 (한자어로 대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당시 세계는 유대아 지역 우측으로 차례로 파르티아과 박트리아, 그리고 서북인도 및 중국에 잇닿게 됩니다. 이것이 BC 1-2세기 상황입니다. 이 지역에는 여러 "알렉산드리아"란 도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의 역사를 말할때 접하게 되는 여러 알렉산드리아들은 이집트의 그 도시가 아닙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알렉산드리아는 현재 아프가니스탄 수도인 카불 지역에 있었습니다. [2] 이 그리스계 박트리아 왕국은 지배층은 그리스계지만 차츰 동화되어 불교 (정확히는 소승불교)가 지배층의 종교로도 자리잡아 갑니다. 아울러 소승불교를 국교로 하여 강력한 제국을 건설한 아소카의 마우리아 제국과 활발한 교류를 가집니다. 아소카 칙령에 따르면 아소카는 600 요자나 (역 6천 km)인근의 국가에 포교승들을 보냈는데, 이들 국가의 왕들은 그리스어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거리는 과장이란 주장도 있는데, 아무튼 최소한 이들 박트리아 지역의 그리스계 국가들이 마우리아 제국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 무렵 많은 그리스인들이 동방을 여러 이유로 (원정, 탐험, 사업, 구도) 방문하게 되는데, 일부는 인도의 사상을 접하고 이를 그리스 철학에 도입한 것 일부 고대 기록이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 문화가 인도의 문화에 영향을 주기도 했지요. 인도에서는 이들 박트리아인들을 '그리스인'이란 뜻으로 팔리어 "요나", 혹은 산스크리트어 "야바나"라고 불렀습니다. 원래는 '이오니아인'이란 뜻의 그리스어에서 왔죠. AD 1세기 말부터 이 지역을 장악한 쿠산제국은 소승보다는 대승을 지원해 서북인도는 대승불교의 중심지로 자리잡습니다. 이것이 바로 간다라 지역입니다. [3] 따라서 BC 1세기에서 AD 1세기 사이에 헬레니즘 사회는 인도의 종교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인들은 보통 인도 종교의 수행자들을 '나체수행자 / 김노스피스타이'로 불렀는데, 인도의 종교를 다시 베다계인 브라만교와 '보다'란 '신'을 믿는 '스라마나스' (=사문)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이 '사문'은 불교승려일 수도 있고, (완전히 벌거벗고 수행하는) 자이나교 승려일 수도 있고, 기타 우파니샤드계 종교의 수행자를 말하기도 합니다. [4] 이스라엘 땅에 불교가 "많이"들어 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와 거의 동시대인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론도 이들 '나체수행자'들에 대해 알고 있던 점으로 보아, 지식인들이 불교나 다른 인도종교의 '존재'에 대해 무지했다고 보긴 힘듭니다. 그리고 유대아 지역이 이집트로 가는 교두보이기 때문에 당시의 국제화된 사회를 고려해 보면, 유대인들이 인도인이나 혹은 박트리아-파르티아에서 온 그리스인들, 혹은 그 지역을 다녀온 유대인들과 교류하지 않고 고립되었다고 보기도 힘들겠죠. 하지마, 불교가 일상적 종교로서 유대아나 이집트에 자리잡았다고 보기엔 증거가 좀 희박합니다. ===> 지금까지 이 포럼에서 가장 많고 다양한 질문을 올리신 방문자이신데, 괜찮으시다면 짧게나마 자기소개를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최광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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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대학생입니다. 군대 가기전 , 잠깐 제가 믿는 기독교에 대해서 좀 연구하고 알고 싶어서 자주 이렇게 들립니다. 기독교 안티들이 하는 소리(예수불자설 , 시대정신에서 주장하는 예수허구설)등이 사실인지도 알고싶고요.(정확히는 신경쓰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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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옙, 자료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최광민 |
1. 예수 같이 평범한 임노동자에게 까지 전해지기는 어려웠을 것 같군요, 인도에 가기에도 무리가 있고요.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만 인도에 대한 정보가 알려졌다고 보면 되는 건가요.
2. 불상이 예수 당시 이스라엘에 들어온적이 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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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 같이 평범한 임노동자에게 까지 전해지기는 어려웠을 것 같군요, 인도에 가기에도 무리가 있고요.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만 인도에 대한 정보가 알려졌다고 보면 되는 건가요.
==> 상인들도 포함시킬 수 있겠죠? 2. 불상이 예수 당시 이스라엘에 들어온적이 있나요? ===> 이건 금시초문이군요. 사실은 불상이란 것 자체가 원래 불교에는 없던 것입니다. 현재까지로는 AD 1세기 중/후반에 서북인도 간다라 지역에서 처음으로 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불교 측의 설명이기도 합니다.) 최광민 |
1.그면 일부 거상 , 지식인들 중 일부(다수는 어렵겠고)는 불교나 인도종교를 알았다는 것이군요. 하층민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전해지기는 어려웠을거고요. 유태인 분위기 상으로는요. 그렇다면 예수 역시 불교의 존재를 몰랐을 가능성이 컸겠고 , 당시 극 소수이자 형성기 였던 대승불교를 알았을 가능성은 더 적었겠군요. 마찬가지로 예수가 인도에 갔을 가능성도 낮았겠고요?
2. 법화경의 성립 연대를 두고 말이 많더군요 ad 50년 경설이 있고 bc 50년경 설이 있던데... 현재 다수설은 무엇인가요? 예전에 글을 읽어보니 bc1세기 경에의 간다라문헌에는 대승불교의 문헌이 발견되지 못했다고 하는데요. 역시 ad 50년경 설이 옳은 것일까요?(대승비불설과 그레고리 쇼펜교수와 곰브리치 교수의 말이 맞다는 가정하에) 3. 예전에 급진성서비평학파의 sydel의 50여개의 모티브는 법화경 + 아함경 +기타 잡다한 불교경전을 포함한 것인지요, 그리고 이게 현재에선 관계없음,증거불충분 으로 끝난거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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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1.그면 일부 거상 , 지식인들 중 일부(다수는 어렵겠고)는 불교나 인도종교를 알았다는 것이군요. 하층민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전해지기는 어려웠을거고요. 유태인 분위기 상으로는요. 그렇다면 예수 역시 불교의 존재를 몰랐을 가능성이 컸겠고 , 당시 극 소수이자 형성기 였던 대승불교를 알았을 가능성은 더 적었겠군요. 마찬가지로 예수가 인도에 갔을 가능성도 낮았겠고요?
===> 물론 교리는 아니더라도, '우화'등의 형태가 교류되었을 수는 있습니다. 이런 가정에서 나온 것이 {이솝우화}와 {자타카}의 연관성이죠. 물론 {이솝우화}에서 {자타카}로 흘러갔는지, {자타카}에서 {이솝우화}로 흘러갔는지, 둘 다 인지, 둘 다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정할 수 없습니다. (생몰연도만 본다면 이솝이 고타마 싯달타 보다 전 세대 인물입니다.) 비슷한 논리에서 {복음서}의 일화와 {불경} ('불경'이란 용어는 좀 너무 광범위합니다만)의 에피소드가 역사적으로 교류한 일화는 주장을 펼칠 수는 있겠지만, 20세기 초반에 {이솝우화}~{자카타} 논쟁이 벌어질 때도 유사일화 간의 유사성은 속설에 등장하는 '{복음서} 표절설'의 주장에서보다는 훨씬 더 엄격한 잣대로 비교되었습니다. 즉, 등장인물, 인물들 간의 관계, 설정, 진행, 의도 면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가령 이상적인 비교라면 수메르의 지우수드라와 창세기의 노아의 홍수설화 쯤은 되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잣대에서 보면 분명 이솝우화와 자타카 사이에는 꽤 비슷한 이야기들이 있음에도, 어느 쪽에서 흘러갔는지 판정불가능하다는 것이 학계의 결론이었습니다. 원래 우화는 인류정신의 공통산물 같은 것이라, 인간의 사유방식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다 비슷하게 나올 수 밖에 없으니까요. 게다가 소위 {불경}이란 카테고리는 너무 광범위 합니다. 불교의 역사상 수백 종의 문서를 모두 {불경}이라고 분류해버리게 되면, 결과적으로 {불경}-대-{복음서}의 비교란, 마치 {도서관 장서}-대-{개인서재도서} 비교와 같은 구도가 되어 버립니다. [Q] 2. 법화경의 성립 연대를 두고 말이 많더군요 ad 50년 경설이 있고 bc 50년경 설이 있던데... 현재 다수설은 무엇인가요? 예전에 글을 읽어보니 bc1세기 경에의 간다라문헌에는 대승불교의 문헌이 발견되지 못했다고 하는데요. 역시 ad 50년경 설이 옳은 것일까요?(대승비불설과 그레고리 쇼펜교수와 곰브리치 교수의 말이 맞다는 가정하에) ===> 아무도 모릅니다. 게다가 '문서화' 시점이 '유통시점'을 꼭 말하지는 않으니까요. 수 백년 간 '구전'으로 전승된 것이라고 주장해 버리면, 고타마 싯달타의 진짜 '불설'이라고 주장해도 할 말이 없죠. [Q] 3. 예전에 급진성서비평학파의 sydel의 50여개의 모티브는 법화경 + 아함경 +기타 잡다한 불교경전을 포함한 것인지요, 그리고 이게 현재에선 관계없음,증거불충분 으로 끝난거고요? ===> 독일 라이프찌히의 신학자 자이델은 급진비평파 (radical criticism)가 아닙니다. 급진비평학파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대학에 기반을 둔 학파로, 독일 튀빙엔 대학의 '고등비평' 보다 더 나가서 신약성서의 바울의 서신들이 전부 진본이 아니라고 주장했었죠. '고등비평학파'는 최소한 네 권 정도는 바울의 진품으로 보았습니다. 아무튼 19-20 세기 초반의 서구학계는 대체로 '대승불교'를 평가절하했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상좌부 불교의 입장에 따라대승불교를 변형불교로 간주했었죠. 게다가 {법화경}은 아주 노골적인 대승경전입니다. (민희식씨의 글을 유포하는 이들은 {불경}과 {법화경}을 거의 동일하게 보더군요.) 그래서 많은 경우, 그들은 {아함}이나 상좌부 측에서 전승한 {자카타}를 더 인용했습니다. 물론 대승계 문서를 증거로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AD 1세기에서 2세기 초반, 두 종교의 교류를 입증할 증거는 무시할 수준으로 봅니다. 노토비치와 신지학의 일련의 사기극이 쐐기를 박은 셈이죠. 최광민 |
대승불교 구전 썰
하긴 구전이라는 썰 을 학계에서 받아들이지 않겠다가 다수설이라해도 대승비불설이 다수설이라해도, 어디까지나 그럴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겠죠... 가능성이 낮을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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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학계'라는 곳은....유행이 많이 지배합니다. 갑자기 어떤 주장들이 단기간에 막 터져나올 땐 딱 두가지 경우 뿐입니다. (1) 절대적 증거에 바탕한 사실이거나, (2) 혹은 파격과 대세와 인기에 편승하는 것이죠. 유감스럽게 학문의 역사를 살펴보면, 많은 경우 후자의 경우입니다. (과학은 그나마 좀 낫죠.) 일반인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르는 듯 해요. 최광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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