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및 그 외 교회사와 관련한 질문입니다

classic Classic list List threaded Threaded
26 messages Options
12
Reply | Threaded
Open this post in threaded view
|

Re: 가톨릭 및 그 외 교회사와 관련한 질문입니다

qorcks200
사실 공심판  사심판 질문은 연옥을
염두한 질문은 아니었습니다
가톨릭에 있을때  꽤 많은 신자들이 궁금해
하던 부분이고 연옥은 천국과 한세트이지
사후에 대기장소로의  기능은 현제 없으니까요
다만 교리의 발전과정에서는 대기소의 기능을
한적은 있지만 지금은 없습니다
현제 가톨릭 교리상 사후에도 천국(연옥)  지옥
이니까요
사후부터 최후의 심판까지 상태는
 개혁자들 같은 경우는 서로 각기 다른 견해라
들었습니다
아 그리고 최후의 심판(백보좌)에서
가톨릭 같은 경우 주의 보좌앞에서
우편 좌편으로 가르고 의인(천국)
죄인(지옥)의 심판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제가 재림지연과 관계있다고 생각하게한
가톨릭 측의 자료를  첨부합니다(물론
가톨릭측 자료라 오류가 있을수 있습니다


성서 속 내세관의 변천 - 셔올부터 연옥까지 

 

1. 구약의 이스라엘은 우주가 크게 하늘과 지상, 지하라는 세 개의 층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중에서도 지하는 인간이 죽으면 내려가는 장소였다. 구약성서는 이곳을 보통 셔올(???)이라고 불렀다.
구약 초기에 이곳은 어둠, 침묵, 망각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와 함께 묘사되었다. 특히 이곳은 야훼와의 관계가 단절된 곳, 야훼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내에서 야훼 유일신 사상이 발전됨에 따라 셔올은 더 이상 독자적인 공간으로 남아있을 수 없었다. 야훼의 영향력은 살아있는 자들의 영역뿐만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영역인 셔올에까지 미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구약성서의 여러 부분에 나타나듯이 이제 야훼는 셔올에 다양한 모습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훼는 구약 어디서도 셔올의 주인이나 지배자, 또는 그 곳 자체에 계신 분으로는 소개되지 않는다. 공간적인 카테고리를 통해 이야기되어지는 셔올은 결국 현세와 분리된 내세라는 공간이 아니라, 현세에서 경험되는 부정적인 상황으로 귀결된다. 즉 셔올은 야훼 하느님과의 친교(communio)를 방해하는 모든 상황, 질병, 박해, 곤궁이나 시련 속에서 경험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하느님과 떨어져 있는 상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상태를 성서는 셔올에 있다고 표현하였다.


2. 나아가 이제 셔올 자체 내에서의 공간적인 구분?세분화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여기서는 공간적인 카테고리뿐만이 아니라 시간적인 카테고리도 같이 작용하였다. 곧 구약 전통에 따르면 의인은 복을 받아야 했고, 악인은 고통당해야 했다. 하지만 이와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자, 이스라엘은 의인들에게 어떤 보상이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구약 전통은, 죽음이 개인의 시간적인 끝은 아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야훼와의 관계가 단순히 죽음으로 끝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죽은 의인들은 마지막 날 부활을 통해 자신의 행위를 보상받을 것이다. 이같은 흐름 속에 셔올 또한 죽은 모든 이들이 영원히 거주하는 장소에서, 개인의 죽음과 세상의 종말 사이의 중간시기 동안 임시로 거주하는 장소가 되었다.
마지막 날 부활 후의 시간에 의인과 악인이 보상?보복을 받는다는 생각은, 점차 개인의 죽음 직후(postmortal)에 즉시 적용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셔올은 이제 의인들에게는 그들이 부활할 때까지 쉬는 평화의 장소였지만, 악인들에게는 최후의 심판 때까지 임시로 처벌 받는 곳이 되었고 나아가 최후의 심판 후에는 영원한 저주의 장소가 되었다. 특히 영혼의 불사와 관련된 헬레니즘의 영향 속에서 셔올 개념은 또다시 변화하게 되었다. 이제 의인의 영혼은 죽은 즉시 천상 복락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셔올은 악인들이 중간시기 동안 처벌받는 장소로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구약 전통에서 셔올은 마지막까지 남아있을 수는 없었다. 곧 야훼 유일신앙 하에서 야훼와 분리된 셔올은 결국 폐기되어야 할 것으로 나타난다.

신구약 중간 시기에는 게힌놈이나 하데스, 아뷔소스와 같은 다양한 개념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중에서도 게힌놈이란 용어가 구약 전통의 셔올 개념을 이어받는다. 즉, 셔올이란 용어는 학문적인 영역에서 사라졌고, 악인들에 대한 형벌의 장소는 게힌놈으로만 불리게 된 것이다.

 

3. 게헨나(γ ?ννα) 또한 먼저 공간적인 카테고리를 통해 살펴보았다. 신약성서에서 12번 언급되는 게헨나는 모두 불붙는 형벌의 장소로 나타나고 있다. 즉 이곳은 악인들이 죽은 뒤에 처해지는 영원한 형벌의 장소였다. 하지만 사도신경(descendit ad infernos), 1베드 3,19 이하에서 나타나듯이 그리스도께서 이곳에 개입하신다. 그리스도는 게헨나에 갇혀있는 영들에게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공간적인 차원에서 예수의 게헨나로의 개입이지만, 실질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시간적인 차원의 것이다. 즉, 감옥에 있는 영들은 노아 시대의 불순종했던 영들로 간주되는데,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구원의지는 과거의 그들에게까지도 미치는 것이다. 물론 이같은 구원 행위는 ‘과거’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세례로 다시 태어난 이들과도 연결되고 있다.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도식, 즉 마지막 날 죽은 자들의 부활이라는 도식이 흔들리게 되었음을 느꼈다. 이제 죽은 자들의 부활은 더 이상 마지막 종말론적 사건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 속의 예수라는 인격체 안에서 이미 일어난 사건이었다. 종말의 때가 이미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사도들과 첫 제자들은 예수의 재림(parusia)이 임박해 있다는 기대와 함께, 재림을 고대하는 자세로 살았다. 이와 같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구약의 묵시문학 전통 안에 있었다. 이와의 연장선상에서 게헨나 또한 이해되었다. 곧 게헨나는 예수의 재림 후 심판받은 악인들이 처하게 되는 영원한 처벌의 장소였다. 이곳은 영혼과 함께 육신까지도 처벌받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재림 기대와는 달리 많은 신자들 특히 순교자들의 죽음을 겪게 되면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죽은 자들의 운명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세례와 성체 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이미 동참한 사람은 죽어서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야 했다. 그들은 예수가 재림할 때까지 하계(下界)에서 대기하며 기다려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이러한 영향 속에 재림에 관한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은 죽음 직후(postmortal)에로 넘어갔다. 헬레니즘적 사고방식이 이와 같은 문제 해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즉, 헬레니즘적 사고방식에서는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므로, 죽은 자들의 운명 또한 즉시 결정될 수 있었다. 악인들에 대한 형벌의 장소인 게헨나 또한 더 이상 예수의 재림 후에 적용되는 것으로 남아있을 수 없었다. 게헨나는 개인이 죽은 뒤 최후의 심판 때까지 머무는 중간시기 형벌의 장소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게헨나 또한 셔올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때에는 사라져야 하는데, 그때에는 야훼와 구분된 어떤 부정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헨나는 유다 전통 속에서 점차 정화의 장소(purgatorium)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에는 해당자들의 참회가 전제되어 있다. 이미 죽은 자들을 위하여 남아 있는 이들이 기도할 수 있다는 생각도 전개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죽은 자들이 중간시기에 받을 게헨나의 형벌은 단축될 수 있었다.


 4. 죽음 이후 정화를 위한 장소로 이해되는 연옥은 성서 내의 진술들에 대한 직접적인 전개라기보다는 오히려 교부 시대에 영지주의와의 논쟁 속에서 전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좁은 의미의 연옥이라는 테마는 성서적이라기보다 오히려 교부적인 테마이다.
이미 성서 전통을 통하여 보았듯이, 유다인들의 묵시문학적 도식과 헬레니즘 도식의 종합 속에서 죽음 직후(postmortal)와 재림(parusia) 사이의 긴장관계는 해소될 수 있었다. 하지만 초기 그리스도교를 위협하던 영지주의와의 대결 속에 교회는 또다시 유다인들의 전통적인 종말론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교부들은 의인들이 하늘에 들어가려면 최후심판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해 나갔다. 이와 동시에 계속적으로 지연되는 예수의 재림에 직면하게 된 교부들은 개인의 죽음 직후 상태에 대한 관심에 집중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은 직후에 바로 의인들이 하늘로 받아들여진다고 주장하였다.
개인의 종말에 대한 관심은 개인의 윤리적인 삶에 대한 강조로도 이어졌다. 즉, 예수의 재림이 지연되고 있는 이유는 인간 개개인에게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예수의 재림은 희망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변해갔다. 이에 많은 서방 교부들은 죽음 직후와 재림 사이의 긴장 관계를 공간적인 카테고리로써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두 극단 사이에 정화하는 불을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이 정화의 기간은 죽음 직후(postmortal)와 재림(parusia) 사이의 시간이다. 그레고리우스 또한 정화의 가능성을 이야기했는데, 그는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이를 지리적으로 묘사하였다.
서방 교부들과는 달리 동방 교부들은 최후의 심판에 앞서는 모든 것이 최종적이지 않고 잠정적인 것이라 여겼다. 이러한 이론을 전개시킨 동방 교부들의 대표 격으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를 들 수 있다. 그들은 내세에서의 형벌은 하느님의 보복이 아니라 교훈과 구원을 위한 잠정적인 수단이라고 이야기하였다. 특히 오리게네스는 아포카타스타시스 이론을 통해 이를 해석해나갔다. 즉, 이 이론을 통해 오리게네스는 지옥을 포함한 모든 형벌은 끝이 있을 것이고, 모든 사물들은 결국 원래의 질서로 회복될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5. 이와 같이 교부 시대에 그 기초가 세워진 연옥(Purgatorium) 이론은 중세 서방 교회에서 하나의 교리로 확정되었다. 물론 동방 교회도 연옥의 기초를 이루는 교의적 개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기초를 더 이상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중세에 본격적으로 이야기되기 시작한 연옥 교리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공간적인 측면에 치중되었다. 즉, 연옥은 재판이 이루어져 그 재판에 따라 벌을 받는 장소였고, 어떤 온도계로도 측정할 수 없는 불의 형벌이 집행되는 곳이었다.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도 다소 마술적인 이미지를 띠게 되어, 기도나 자선을 통하여 연옥에 있는 영혼들의 형벌 시기를 삭감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도 자리 잡게 되었다. 
이에 반발한 종교 개혁가들은 구원이 오직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오는 것이지 인간의 업적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연옥 교리에 반감을 표시했다. 특히 루터는 이를 시간적으로 해석하려고 시도했는데, 그는 죽은 직후와 재림 사이의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영혼이 수면을 취하고 있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따라서 죽음 직후와 재림 사이의 시간적 간격은 한순간이다. 결국 그가 지향하는 것은 죽음 직후가 아니라, 최종적인 시간의 종말에 일어날 사건인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서방 교회는 공의회를 통하여 연옥 이론을 공식적인 교리로 확정지었다. 그중에서도 트리엔트 공의회는 연옥의 공간적인 모습이나 정확한 기간을 언급하지 않음으로서 좀 더 분명하게 연옥 이론을 확립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를 통해 현대 신학은 연옥 교리를 공간적, 시간적 카테고리를 통하여 전개함으로써 함께 있을 수밖에 없었던 오해들로부터 자유로워졌고, 다른 한편으로 공간적, 시간적으로 표현되었던 것들의 긍정적인 신학적 내용들을 표현해 볼 수 있는 기회도 가져다 주었다.

2  하다보니 히폴리투스가 말하는 일시적 징벌은
   무엇을 말하는지 궁금해집니다

3제가 성체파트를 보다가  하는 질문입니다
  정교회는 영적임재보다는
   실채변환에 가까운거 아니었나요 교리문답을
   봐도 그렇게 이해가 됩니다 다만
   서방신학같은 사변적 설명을 거부하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체변환 설명에서
  질료 형상변화 없는 우유적 실재로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우유에 관해 설명하신 부분은
  오히려 형상에 관한 설명 같습니다
  우유는 저도 이해하려다 포기해지만
  사건과(우연/필연)  관련된걸로 알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Reply | Threaded
Open this post in threaded view
|

Re: 가톨릭 및 그 외 교회사와 관련한 질문입니다

choin
Administrator
This post was updated on .
<quote author='qorcks200'>
사실 공심판  사심판 질문은 연옥을
염두한 질문은 아니었습니다
가톨릭에 있을때  꽤 많은 신자들이 궁금해
하던 부분이고 연옥은 천국과 한세트이지
사후에 대기장소로의  기능은 현제 없으니까요
다만 교리의 발전과정에서는 대기소의 기능을
한적은 있지만 지금은 없습니다
현제 가톨릭 교리상 사후에도 천국(연옥)  지옥
이니까요

==>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연옥에 있는 사람이 마치 지옥에 갈 수 있는 것처럼 오해하고들 있는 것은 유감입니다.


사후부터 최후의 심판까지 상태는
 개혁자들 같은 경우는 서로 각기 다른 견해라
들었습니다
아 그리고 최후의 심판(백보좌)에서
가톨릭 같은 경우 주의 보좌앞에서
우편 좌편으로 가르고 의인(천국)
죄인(지옥)의 심판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 프로테스탄트 측은 이때 백보좌에서 구분을 구원받지 못한 이들이 완전히 분리 (정죄)되는 장면을 뜻하는 것이라 이해합니다. 물론 좀 다르게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제가 재림지연과 관계있다고 생각하게한
가톨릭 측의 자료를  첨부합니다(물론
가톨릭측 자료라 오류가 있을수 있습니다

===> 자료 감사합니다. 제 생각엔 {에녹서}가 BC 2-1세기에 작성된 것이라면, 사후 영혼의 분리와 대기장소에서 부활을 대기한다는 컨셉은 이미 기독교 시작 이전에 유대교 분파 안에 있었던 것이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http://kwangmin.blogspot.com/2013/01/blog-post_20.html)

그리고 오리게네스의 아포카타시스 이론은 연옥과는 꽤 차이가 있는 개념이고, 심지어 아주 초기에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므로 보편교회의 교리 안에 수용하기엔 꽤 곤란할 듯 합니다.

=========================================
성서 속 내세관의 변천 - 셔올부터 연옥까지 

 

1. 구약의 이스라엘은 우주가 크게 하늘과 지상, 지하라는 세 개의 층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중에서도 지하는 인간이 죽으면
내려가는 장소였다. 구약성서는 이곳을 보통 셔올(???)이라고 불렀다.
구약 초기에 이곳은 어둠, 침묵, 망각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와 함께 묘사되었다. 특히 이곳은 야훼와의 관계가 단절된 곳, 야훼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내에서 야훼 유일신 사상이 발전됨에 따라 셔올은 더 이상 독자적인 공간으로
남아있을 수 없었다. 야훼의 영향력은 살아있는 자들의 영역뿐만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영역인 셔올에까지 미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구약성서의 여러 부분에 나타나듯이 이제 야훼는 셔올에 다양한 모습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훼는 구약 어디서도 셔올의
주인이나 지배자, 또는 그 곳 자체에 계신 분으로는 소개되지 않는다. 공간적인 카테고리를 통해 이야기되어지는 셔올은 결국 현세와 분리된
내세라는 공간이 아니라, 현세에서 경험되는 부정적인 상황으로 귀결된다. 즉 셔올은 야훼 하느님과의 친교(communio)를 방해하는 모든
상황, 질병, 박해, 곤궁이나 시련 속에서 경험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하느님과 떨어져 있는 상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상태를 성서는 셔올에 있다고 표현하였다.


2. 나아가 이제 셔올 자체 내에서의 공간적인 구분?세분화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여기서는 공간적인 카테고리뿐만이 아니라 시간적인
카테고리도 같이 작용하였다. 곧 구약 전통에 따르면 의인은 복을 받아야 했고, 악인은 고통당해야 했다. 하지만 이와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자, 이스라엘은 의인들에게 어떤 보상이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구약 전통은, 죽음이 개인의 시간적인 끝은 아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야훼와의 관계가 단순히 죽음으로 끝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죽은 의인들은 마지막 날 부활을 통해 자신의
행위를 보상받을 것이다. 이같은 흐름 속에 셔올 또한 죽은 모든 이들이 영원히 거주하는 장소에서, 개인의 죽음과 세상의 종말 사이의
중간시기 동안 임시로 거주하는 장소가 되었다.
마지막 날 부활 후의 시간에 의인과 악인이 보상?보복을 받는다는 생각은, 점차 개인의 죽음 직후(postmortal)에 즉시 적용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셔올은 이제 의인들에게는 그들이 부활할 때까지 쉬는 평화의 장소였지만, 악인들에게는 최후의 심판 때까지 임시로
처벌 받는 곳이 되었고 나아가 최후의 심판 후에는 영원한 저주의 장소가 되었다. 특히 영혼의 불사와 관련된 헬레니즘의 영향 속에서 셔올
개념은 또다시 변화하게 되었다. 이제 의인의 영혼은 죽은 즉시 천상 복락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셔올은 악인들이 중간시기 동안 처벌받는
장소로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구약 전통에서 셔올은 마지막까지 남아있을 수는 없었다. 곧 야훼 유일신앙 하에서 야훼와 분리된 셔올은 결국
폐기되어야 할 것으로 나타난다.

신구약 중간 시기에는 게힌놈이나 하데스, 아뷔소스와 같은 다양한 개념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중에서도 게힌놈이란 용어가 구약 전통의 셔올
개념을 이어받는다. 즉, 셔올이란 용어는 학문적인 영역에서 사라졌고, 악인들에 대한 형벌의 장소는 게힌놈으로만 불리게 된 것이다.

 3. 게헨나(γ ?ννα) 또한 먼저 공간적인 카테고리를 통해 살펴보았다. 신약성서에서 12번 언급되는 게헨나는 모두 불붙는 형벌의
장소로 나타나고 있다. 즉 이곳은 악인들이 죽은 뒤에 처해지는 영원한 형벌의 장소였다. 하지만 사도신경(descendit ad
infernos), 1베드 3,19 이하에서 나타나듯이 그리스도께서 이곳에 개입하신다. 그리스도는 게헨나에 갇혀있는 영들에게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공간적인 차원에서 예수의 게헨나로의 개입이지만, 실질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시간적인 차원의 것이다. 즉, 감옥에 있는 영들은 노아 시대의 불순종했던 영들로 간주되는데,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구원의지는 과거의
그들에게까지도 미치는 것이다. 물론 이같은 구원 행위는 ‘과거’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세례로 다시 태어난 이들과도 연결되고
있다.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도식, 즉 마지막 날 죽은 자들의 부활이라는 도식이 흔들리게 되었음을 느꼈다. 이제
죽은 자들의 부활은 더 이상 마지막 종말론적 사건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 속의 예수라는 인격체 안에서 이미 일어난 사건이었다. 종말의
때가 이미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사도들과 첫 제자들은 예수의 재림(parusia)이 임박해 있다는 기대와 함께, 재림을 고대하는 자세로
살았다. 이와 같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구약의 묵시문학 전통 안에 있었다. 이와의 연장선상에서 게헨나 또한 이해되었다. 곧 게헨나는
예수의 재림 후 심판받은 악인들이 처하게 되는 영원한 처벌의 장소였다. 이곳은 영혼과 함께 육신까지도 처벌받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재림 기대와는 달리 많은 신자들 특히 순교자들의 죽음을 겪게 되면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죽은 자들의 운명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세례와 성체 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이미 동참한 사람은 죽어서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야
했다. 그들은 예수가 재림할 때까지 하계(下界)에서 대기하며 기다려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이러한 영향 속에 재림에 관한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은 죽음 직후(postmortal)에로 넘어갔다. 헬레니즘적 사고방식이 이와 같은 문제 해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즉, 헬레니즘적
사고방식에서는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므로, 죽은 자들의 운명 또한 즉시 결정될 수 있었다. 악인들에 대한 형벌의 장소인 게헨나 또한 더
이상 예수의 재림 후에 적용되는 것으로 남아있을 수 없었다. 게헨나는 개인이 죽은 뒤 최후의 심판 때까지 머무는 중간시기 형벌의 장소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게헨나 또한 셔올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때에는 사라져야 하는데, 그때에는 야훼와 구분된 어떤 부정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헨나는 유다 전통 속에서 점차 정화의 장소(purgatorium)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에는 해당자들의
참회가 전제되어 있다. 이미 죽은 자들을 위하여 남아 있는 이들이 기도할 수 있다는 생각도 전개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죽은 자들이
중간시기에 받을 게헨나의 형벌은 단축될 수 있었다.


 4. 죽음 이후 정화를 위한 장소로 이해되는 연옥은 성서 내의 진술들에 대한 직접적인 전개라기보다는 오히려 교부 시대에 영지주의와의
논쟁 속에서 전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좁은 의미의 연옥이라는 테마는 성서적이라기보다 오히려 교부적인 테마이다.
이미 성서 전통을 통하여 보았듯이, 유다인들의 묵시문학적 도식과 헬레니즘 도식의 종합 속에서 죽음 직후(postmortal)와
재림(parusia) 사이의 긴장관계는 해소될 수 있었다. 하지만 초기 그리스도교를 위협하던 영지주의와의 대결 속에 교회는 또다시
유다인들의 전통적인 종말론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교부들은 의인들이 하늘에 들어가려면 최후심판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해 나갔다. 이와 동시에 계속적으로 지연되는 예수의 재림에 직면하게 된 교부들은 개인의 죽음 직후 상태에 대한 관심에 집중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은 직후에 바로 의인들이 하늘로 받아들여진다고 주장하였다.
개인의 종말에 대한 관심은 개인의 윤리적인 삶에 대한 강조로도 이어졌다. 즉, 예수의 재림이 지연되고 있는 이유는 인간 개개인에게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예수의 재림은 희망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변해갔다. 이에 많은 서방 교부들은 죽음
직후와 재림 사이의 긴장 관계를 공간적인 카테고리로써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두 극단 사이에
정화하는 불을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이 정화의 기간은 죽음 직후(postmortal)와 재림(parusia)
사이의 시간이다. 그레고리우스 또한 정화의 가능성을 이야기했는데, 그는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이를 지리적으로 묘사하였다.
서방 교부들과는 달리 동방 교부들은 최후의 심판에 앞서는 모든 것이 최종적이지 않고 잠정적인 것이라 여겼다. 이러한 이론을 전개시킨 동방
교부들의 대표 격으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를 들 수 있다. 그들은 내세에서의 형벌은 하느님의 보복이 아니라 교훈과 구원을
위한 잠정적인 수단이라고 이야기하였다. 특히 오리게네스는 아포카타스타시스 이론을 통해 이를 해석해나갔다. 즉, 이 이론을 통해
오리게네스는 지옥을 포함한 모든 형벌은 끝이 있을 것이고, 모든 사물들은 결국 원래의 질서로 회복될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5. 이와 같이 교부 시대에 그 기초가 세워진 연옥(Purgatorium) 이론은 중세 서방 교회에서 하나의 교리로 확정되었다. 물론
동방 교회도 연옥의 기초를 이루는 교의적 개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기초를 더 이상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중세에 본격적으로 이야기되기
시작한 연옥 교리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공간적인 측면에 치중되었다. 즉, 연옥은 재판이 이루어져 그 재판에 따라 벌을 받는 장소였고,
어떤 온도계로도 측정할 수 없는 불의 형벌이 집행되는 곳이었다.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도 다소 마술적인 이미지를 띠게 되어, 기도나
자선을 통하여 연옥에 있는 영혼들의 형벌 시기를 삭감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도 자리 잡게 되었다. 
이에 반발한 종교 개혁가들은 구원이 오직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오는 것이지 인간의 업적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연옥 교리에
반감을 표시했다. 특히 루터는 이를 시간적으로 해석하려고 시도했는데, 그는 죽은 직후와 재림 사이의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영혼이
수면을 취하고 있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따라서 죽음 직후와 재림 사이의 시간적 간격은 한순간이다. 결국 그가 지향하는 것은 죽음 직후가
아니라, 최종적인 시간의 종말에 일어날 사건인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서방 교회는 공의회를 통하여 연옥 이론을 공식적인 교리로 확정지었다. 그중에서도 트리엔트 공의회는 연옥의 공간적인
모습이나 정확한 기간을 언급하지 않음으로서 좀 더 분명하게 연옥 이론을 확립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를 통해 현대 신학은 연옥 교리를
공간적, 시간적 카테고리를 통하여 전개함으로써 함께 있을 수밖에 없었던 오해들로부터 자유로워졌고, 다른 한편으로 공간적, 시간적으로
표현되었던 것들의 긍정적인 신학적 내용들을 표현해 볼 수 있는 기회도 가져다 주었다.
=============================

2  하다보니 히폴리투스가 말하는 일시적 징벌은
   무엇을 말하는지 궁금해집니다

===> 히폴리투스가 말한 '일시적 형벌'은 해당 문맥에서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자가 정화된다는 식의 연옥과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그 아래 문단에서 설명된 대로 일시적 형벌은 악인들이 대심판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약간 맛보며 심판 때까지 (따라서 일시적으로) 공포의 상태에 놓이는 것을 뜻합니다.


3제가 성체파트를 보다가  하는 질문입니다
  정교회는 영적임재보다는
   실채변환에 가까운거 아니었나요 교리문답을
   봐도 그렇게 이해가 됩니다 다만
   서방신학같은 사변적 설명을 거부하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
상기 질문들에 대해 제가 답변한 내용을 하나로 정리해서 블로그로 옮겼습니다.

https://kwangmin.blogspot.com/2019/11/vs-04-xo8gh8.html

최광민

------------------------------------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체변환 설명에서
  질료 형상변화 없는 우유적 실재로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우유에 관해 설명하신 부분은
  오히려 형상에 관한 설명 같습니다
  우유는 저도 이해하려다 포기해지만
  사건과(우연/필연)  관련된걸로 알고있습니다

----------------------------------------------------------------

상기 질문들에 대해 제가 답변한 내용을 하나로 정리해서 블로그로 옮겼습니다.

https://kwangmin.blogspot.com/2019/11/vs-04-xo8gh8.html

최광민


/ 최광민
Reply | Threaded
Open this post in threaded view
|

Re: 가톨릭 및 그 외 교회사와 관련한 질문입니다

qorcks200





1아마  성서본문을 해석한것이겠지만
구약위경이라던가 외경( 2정경) 혹은
성서외 문서등을 자료로 사용했을 가능성은
 높은것 같습니다. 보통 내세관의 변천사같은걸
(셔올이나 림보등)
이야기 하는 자료들은  다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하니까요.가톨릭은 경외문서에 대한거부감도
덜한것도 있을테구요 오리게네스나 클레멘스는
종종 보편구원론과 더불어 정화의 컨셉에
영향을 준 교부(아우구스티노와 더불어)
로 연옥에 발전도상에서 언급될뿐이지
당연히 중세의 연옥교리와는 차이가
있지요 대충 연옥교리는 오히려 흑사병이라던가
도시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얼핏들었는데
당연히 정확한건 아닙니다
 
 


2아..제가 질료 형상 변화없는 우유적 실제를
       어디서 본건지 모르겠네요 ㅎ
       이번에 우유에 대해서 제대로 배웁니다
       예전에 질료 형상과 더불어 당최 이해를
       못한건데 서로 다 관계가 있는거군요
       

3 당연히 제대로 이해하고 계시고
    제가 머라고 평할 위치가 아닙니다


좋은설명 감사드립니다






If you reply to this email, your message will be added to the discussion below:
http://forum-scientiarum.16390.x6.nabble.com/-tp4982084p4982111.html
To unsubscribe from 가톨릭 및 그 외 교회사와 관련한 질문입니다, click here.
NAML
Reply | Threaded
Open this post in threaded view
|

Re: 가톨릭 및 그 외 교회사와 관련한 질문입니다

xo8gh8
This post was updated on .
In reply to this post by choin
한달만에 찾아뵙네요.
오랜만에 질문을 더 해 보겠습니다.

1. 동방 정교회에서는 가톨릭에서 베드로의 수위권의 근거로 사용하는 마태복음 16장 18-19절의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나요?
또 4세기 경 아우구스티누스는 "내가 이 반석 위에"라는 절에서 반석을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했다고 알고 있는데 그러면 로마 교회에서 "반석"의 의미가 베드로를 뜻하며 교황수위권의 근거로서 사용된 시기는 언제부터 인가요?

2. 그러면 가톨릭은 사실상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반 평신도는 성경을 독서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해석할 권한은 전혀 없으며 철저히 사제의 해석에 의존해야한다고 가르치는 건가요? 그러면 가톨릭에서 성서 독서라는 행위 자체는 애당초 의미가 없는 행동 아닌가요?

3. 히틀러가 생전에 신의 존재를 강하게 부정하는 등의 무신론적 발언을 한 기록이 있나요? 있다면 자료를 주시는 게 가능하신가요?

4.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은 삼위일체 교리를 거부했나요?

5. 공산주의 정권하에서의 종교나 신앙단체들에 대한 탄압은 무신론에 의거한 행동이었나요?
어떤 신무신론자들은 러시아 제국과 러시아 정교회의 관계의 사례처럼 공산화 이전 해당 국가의 기득권과 종교/신앙 세력의 관계가 공존관계에 있었고 공산주의 정권은 무신론과는 관련없이 해당 국가의 종교/신앙 세력을 단순히 정치적 기득권과 결탁한 세력으로 보고 숙청했던 단순한 정치적 범죄에 불과한 것이며,  더군다나 해당 공산주의 정권이 특정 지도자를 신격화하거나 교조주의적 모습을 보여주어 오히려 교조화된 종교와 유사성을 보여주었다며 공산주의 정권의 종교/신앙 탄압과 무신론의 관계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던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6. 갈릴레이의 종교재판의 배경과 그 이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7.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 및 에이브러햄 링컨의 신앙관은 어떠했나요?
또 미국이 개신교 이념에 건국된 국가라는 미국 보수우익들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8. 예전 질문에 대한 Kwangmin님의 답변 중 마르틴 루터는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하셨던 게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최근 제가 찾아본 가톨릭 출판사의 사와다 아키오가 쓴 루터와 마리아라는 책에서 마르틴 루터가 1527년 주님 탄생 예고 첨례 복음에서 마리아가 원죄로 부터 구원된 욕정이나 죄없이 잉태된 여자라는 개념을 분명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피력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런데 혹시 이에 대응되는 루터가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교리를 거부하는 의사를 표력한 자료가 있다면 보여주시는 게 가능하신가요?
Reply | Threaded
Open this post in threaded view
|

Re: 가톨릭 및 그 외 교회사와 관련한 질문입니다

choin
Administrator

정리해서 답변은 블로그로 옮겼습니다.

https://kwangmin.blogspot.com/2019/11/vs-04-xo8gh8.html

최광민
Reply | Threaded
Open this post in threaded view
|

Re: 가톨릭 및 그 외 교회사와 관련한 질문입니다

choin
Administrator
This post was updated on .
In reply to this post by qorcks200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서 "아멘 = 아문"에 대해 예전에 써둔 글을 백업하드에서 찾아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https://kwangmin.blogspot.com/2021/12/vs_24.html

2022년 부터는 이 게시판을 더이상 사용하지 않고, 티스토리의 방명록을 대신 사용합니다. 구글 블로그가 메인이고, 티스토리는 백업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https://kwangminus.tistory.com/guestbook

이상입니다.

최광민
12